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함길도 병마절도사 겸경성도호부사(咸吉道兵馬節度使兼鏡城都護府事)를 지내셨다.세조(世祖) 丙子(一四五六)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운동(復位運動)에 가담하여 화(禍)를 당한 사실이 『노릉지(魯陵誌)』 및 『동학사초혼기(東鶴寺招魂記)』·『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홍재전서(弘齋全書)』·『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기록되어 있다.세조(世祖) 戊寅(一四五八)에 왕(王)이 동학사(東鶴寺)에 머물면서 병자년에 억울하게 죽은 여러 신하들의 성명을 써서 비석에 새기고 제사지낼 전답을 주라 명한 후, 초혼(招魂)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공은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초혼각(招魂閣)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정조(正祖) 己亥(一七七九)에 왕이 겸천서원(謙川書院)에 배향할 것을 명하고 辛亥(一七九一)에는 장릉(莊陵:端宗의 陵) 별단(別壇) 제십삼위위(第十三位)로 배향(配享)되어 제사를 받게 되었다. 己未(一七九九)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을 추증(追贈)하면서 임금이 전교(傳敎:왕의 말씀)하기를「조숭문의 충성심과 절의는 성승(成勝)·성삼문(成三問) 부자와 같다」라고 하셨다.헌종(憲宗) 癸卯(一八四三)에 절민(節愍)이란 시호(諡號:죽은 후 훌륭한 사적이 있는 사람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號)를 내렸는데 시법(諡法)에 「제도를 삼가 행하는 것을 절(節)이라 하고 백성들이 슬프게 여기는 것을 민(愍)이라 한다[謹行制度曰節 使民悲傷曰愍]」라고 하였다. 좨주(祭主) 송환기(宋煥箕)가 공의 충절사적(忠節事蹟)을 짓고 판서(判書) 김이양(金履陽) 영의정(領議政) 조인영(趙寅永)이 시장(諡狀:시호를 내리는 글)을 짓고, 참판(參判) 김정균(金鼎均)이 행장(行狀) 및 영모재기(永慕齋記)를 지었으며 참봉(參奉) 최영조(崔永祚)가 정려중수기(旌閭重修記)를, 안동(安東) 김순동(金舜東)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이 충절비명(忠節碑銘)을 짓고 글씨를 썼다.고종(高宗) 甲辰(一九0四)에 숙모전(肅慕殿)에 나라에서 액(額: 懸板)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전정(殿庭) 서쪽채에 모셔졌다.配정부인(貞夫人) 昌寧成氏(창녕성씨) 생졸 연대(生卒年代)가 자세하지 않다. 墓순천시 상사면(上沙面) 운곡(雲谷) 해좌(亥坐)인데 상석과 망주가 있다. 父양혜공(襄惠公) 성달생(成達生) 祖문숙공(文肅公) 성석용(成石瑢) 曾祖문정공(文靖公) 성여완(成汝完) 外祖부윤(府尹) 풍양(豊壤) 조운개(趙雲价)